[칼럼] 우리들의 아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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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들의 아바타
  • 송장길 (언론인, 수필가)
  • 승인 2020.08.30 2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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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 술잔을 연거푸 비우면서 이따금 한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술기운이 어지간 하자 굳게 닫혔던 말문을 열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잘난 내 생애였다는 거지? 측은도 하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가? 강물에 섞여 떠내려가는 한 움큼의 수분 같은 신세였군. 살아오면서 구비마다 몇 차례 뜻대로의 선택은 했지만, 크게 보면 큰 바다로 들어가는 하천의 지류 같은 갈음일 뿐이었네.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헤어나지 못하는 흐름 속에 갇혀서 허둥댄 미물이 아니었던가!”

송장길(언론인, 수필가)
송장길(언론인, 수필가)

생각은 구체적인 사실보다, 살아온 궤적을 되짚는 데에 꽂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영유한 삶은 줄곧 작던 크던 소속된 조직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그 내부의 기류에 따라 몰려다니는 개미 같은 존재였다는 진단이다. 어려서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가풍(家風)으로 길들여졌고, 또래들과 어울려서도 그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학창생활은 더 조직화되고, 규범화되었으며, 학습과 규칙이라는 무거운 짐이 늘 짓누르던 시기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교육까지의 시기를 통틀어 하나의 학생일 뿐이었지, 무구한 소년이나 청년의 참모습은 아니었다.

모든 게 세상이 쳐 놓은 망에 갇혀 있었고, 본래의 삶을 살았다고 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직장은 더 무섭게 옥죄는 권력이었고, 옴짝달싹 못하게 규제된 삶의 현장이었다. 위로는 층층의 상사들이 일거수일투족을 내려다보는 눈초리가 따가웠고, 옆으로는 경쟁의 송곳들이 즐비하였으며, 아래에서도 내색은 않지만 위를 재단하며 계산기를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숨막히는 안팎의 시선 속에서 무거운 책무를 껴안고 하나의 세포처럼 뛰던 시절이 직장생활 아닌가. 집단의 생리를 대놓고는 벗어날 수 없는 분자, 뭉쳐서 굴러가는 덩어리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삶의 역정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다는 지적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치밀한 그물 안에도 소소한 재미와 즐거움이 없지 않았고, 용기만 있다면 상황을 타개할 기회를 만들 수도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테두리 안에서의 생활은 사회화와 인격 형성의 거름이었음도 부인하지 않는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또는 ‘마음먹기에 따라 천당과 지옥으로 다르게 보인다’는 아포리즘(Aphorism)이 인구에 회자됨을 모르는 바가 아니고, 상황을 전향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그러나 오늘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온 세상은 빡빡하게 직조된 거대한 레비아탄(Leviathan)이었고, 그 안에서 발버둥쳤던 자신의 과거와 삶의 형질은 너무도 초라하게 보였다.

그는 한 친구가 요양원에서 사망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병문안을 갔던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생이 별개 아니었네”하며 흐느끼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고인은 최고의 대기업에서 앞서가던 인재였지만, 속박이 싫다고 튀어나와 가능성의 나라라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스로 작은 회사를 세워 경영했었다. 회사운영이 어디 쉬운 일인가? 모처럼 만나 대작하면서 듣는 그 어려움은 퇴직 전의 회사에서 보다 훨씬 더 심한 구속이었다. 겹겹이 조여오는 경영압박에 지쳤으며, 괴로워하다 못해 끝내 와병했던 것이다. 깡마른 삭신에 거의 해골만 남은 몰골로 간신히 명줄을 이어가던 고인 옆에서 그는 불길하게도 이제야 그가 희구하던 자유를 만나겠다는 예감이 들어 잠시 면벽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식들을 어느 부모에 못하지 않게 끔찍이 키웠다. 아이들의 몸은 곧 자신의 살갗이자 심장이었다. 그러나 성장한 뒤 독자적인 사회생활에 들어가자 그들은 이미 다른 행성으로 멀어져 갔다. 기껏해야 명절이나 생일 때 들르거나 전화를 거는 정도의 왕래가 전부다. 큰 사고를 당했거나 발병했을 때는 달려와 아파했지만 그뿐, 바로 일상의 빽빽함으로 뿔뿔이 달아나곤 했다. 자신이 그랬듯이 파장의 쓸쓸함은 부모들이 받는 대물림 인가? “아이들도 나름의 일에 엮여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데 무슨 망령된 바람인가?”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그리움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그의 그리움은 소박한 부정(父情)만이 아니다. IT와 디지털 시대는 사회생활을 더 촘촘히 엮는다. 더구나 더 빼곡히 생활을 지배하는 컴퓨터와 핸드폰은 태생적으로 인간의 감정 이입에 비우호적이다. 메시지에 끈끈한 정서가 원천 배제되는 건 아니지만, 효율성에 밀려 자칫 거부될 수 있는 요주의(要注意) 대상이다. 더 조밀하고, 더 메마른 세상에서 자식들의 삶은 어떻게 변할지 걱정스러워지는 것이다. 자식들의 후예들은 더 냉엄한 비인간화로 치닫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비틀 거리로 나와 정처없이 걸어 나갔다. 그가 앞을 제대로 보고 걸어가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 행인은 분명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현신(顯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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