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황제 암살 미수 사건과 혁명가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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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황제 암살 미수 사건과 혁명가 레닌
  • 이정식 작가
  • 승인 2020.08.10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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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3세 동상 (이르쿠츠크)
알렉산드르 3세 동상 (이르쿠츠크)

계속된 황제 사냥

1881년 3월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사건을 주도한 인민의 의지당에 가담한 사람들은 도스토옙스키 소설 악령(1872)의 모티브가 된 네차예브 사건의 주범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무정부주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다. 네차예프의 사상은 토지를 농민에게 넘겨줘야하며 국가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네차예프와 같은 인민주의자들의 슬로건은 토지와 자유였다. ‘인민의 의지당은 억압적 전체정치를 종식시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며, 농민혁명을 성공시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다시 말해 농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이었다. 그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르를 제거해야 한다고 보고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집요하게 추진해 왔다. 그들은 차르 암살 작전을 황제(차르) 사냥이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사회의 오래된 숙제였던 농노해방조치(1861)를 취해 해방자 알렉산드르로도 불렸다. 그렇다고 체제 자체가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농노해방에 대해서도 기만적이란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게르첸, 체르니셰프스키 등 당시 러시아의 사상가와 혁명가들은 러시아가 비인간적이고 격심한 빈부격차로 하층민이 더욱 비참해지는 유럽식 자본주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며 농민공동체의 전통을 살려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1870년 대 후반에 쓰여진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도 사회주의는 어린 소년에 불과한 꼴랴의 입을 통해 이렇게 주장된다. 꼴랴는 친구와의 대화중에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친구 스무로프가, “사회주의가 뭔데?”하고 묻자 꼴랴는, “ 만인이 평등하고, 모두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혼인 제도도 없고, 누구에게나 적합한 종교와 법이 존재하며, 거기에서는 다른 것들도 다 그런 식이지.”라고 답한다.

도스토옙스키 자신은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소설 속에 그같이 표현한 것은, 당시 사회주의가 러시아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적발된 알렉산드르 3세 암살음모

인민의 의지당은 마침내 차르 암살에 성공했지만, 이 사건에 대한 국내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인민주의자들은 차르가 죽으면 러시아 전역에 혁명의 불길이 본격적으로 솟아오를 것으로 확신했지만, 국민들은 오히려 죽은 알렉산드르 2세에 동적적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 사망 후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해 그나마 아버지 대에 취해 온 유화정책을 모조리 취소하고 전체정치를 강화하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제한적인 자유주의적 정책, 언론 자유 등은 억제되고 반정부 활동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다.

그러던 중 1887년 알렉산드르 3세 암살음모가 적발됐다. ‘인민의 의지당후신 격인 인민주의 테러조직이 당국의 촉수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거사 예정일은 6년 전과 같은 31일이었다. 가담자들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 채 체포됐다. 가담자들은 58일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 가운데 귀족의 아들이었던 니즈니노브고로드 출신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1866~1887) 라는 21세의 대학생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는 장남이었는데 네 살 아래 동생이 후일 러시아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다. 레닌이 혁명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이같은 맏형의 죽음과 무관치 않다. 레닌은 레나강에서 따온 가명이며 본명은 블리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다.

블라디미르 레닌
블라디미르 레닌

한편, 알렉산드르 2세 차르 암살을 지휘한 소피야 페롭스카야는 정치범으로 사형 당한 러시아 최초의 여성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운하 옆에는 알렉산드르 3세에 의해 피의 구세주 성당’(공식명칭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 세워졌다. 1883년 공사를 시작해 후계자 니콜라이 2세 때인 190724년 만에 완공되었다.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유명한 이 성당은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명소의 하나다.

도스토옙스키가 살아있었다면 ...

만약에 도스토옙스키가 살아있었다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을 당연히 카라마조프 씨에 형제들후편에 다뤘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악령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과격한 혁명가들의 폭력적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료샤의 역할에 대한 구상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도스토옙스키는 188011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전편을 마무리 한 후 앞으로 20년간 쓸 것들에 대한 구상을 메모하기도 했지만, 그후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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